1. 바티칸 시국
  그러나 이후 중세에 걸쳐 로마는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갖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주후 962년 신성 로마제국의 성립으로 로마는 교황권과 황제권이 충돌하는 무대가 되었다.
주후 12세기에 접어들어 로마 라치오(Lazio, 로마 중심지)의 귀족들이 황제의 지지를 얻어 교황과 자주 대립하였으나 종교도시의 성격은 짙었다.
주후 14세기에 아비뇽 교황청시대(주후 1307-1377년)에 로마가 침체하기는 했지만 15-16세기는 식수투스4세(Sixtus Ⅳ, 1471-1484년)를 비롯한 4명이 르네상스시대의 교황으로 등장하여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에 테베레강의 좌안(左岸), 바티칸의 대안(對岸)부분에 대규모의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구시가의 기본적인 형태였다.
주후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의 바로크시대까지 계속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많은 궁전과 광장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교황의 도시 로마”는 이탈리아 교황 국가의 수도로서 19세기이래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대하여 강력하게 저항했다. 주후 1849년 교황은 프랑스 군사력에 의하여 시민 공화제를 붕괴시켰고 이어 1861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건설된 이후에도 로마와 그 주변을 계속 지배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를 처음에는 토리노, 다음에는 피렌체로 옮겼다.
1870년 9월에 로마는 이탈리아 왕국 군대에 의해 점령되어 1871년 5월에 다시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자 교황 및 그 후계자에게는 바티칸 궁전, 라테란 성당, 카스텔간돌포 별장의 영구 사용권이 허용되었다. 이때부터 화가 난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 들어앉아 스스로 “바티칸의 죄수”라고 칭하고 이탈리아 왕국과 대립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로마 문제였다.
1929년 2월 무솔리니(Mussolini, 총리 재임 1922-1943)와 교황 피우스2세(PiusⅡ, 재위 1922-1939)사이에 라테란협정(政敎和約)에 의해 로마문제는 그 분쟁이 해결되어 바티칸 시국(市國)이 되었다.
콜로세움
그리하여 이탈리아가 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바티칸 시국(Vatican City State, 국토;1,500km2 인구: 269만명)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제법상의 주권국이 되었다.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한 카톨릭교회의 총 본산으로 카톨릭 교황국이 된 것이다. 바티칸 시국의 독자적인 국기(國旗)는 교황기이며 국가(國歌), 경찰력을 갖고 외국과 대사를 교환하는 등의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로마 역대의 황제는 후세에 남을 웅장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일반 건물과 전연 대조적인 육중한 공공건물은 세계를 제패한 제국의 권력을 과시하는 상징이 되었다. 로마 전성기에 있었던 건축물에는 둥근 아치(Arch)와 둥근 천장(Vault)을 만들었고 벽돌 건물이 변하여 대리석 건물을 건축했으며 로마에서 최초로 콘크리트를 발명하여 장대한 건축을 만들어 내어 건축사(建築史)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인의 특성은 섬세함보다는 끈기를, 경쾌함보다는 억셈을, 아름다움보다는 크기를, 우아함보다는 실용적이었다.
바티칸궁전(Vatican Place)은 교황이 거주하는 궁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이지만 가장 웅장한 궁전이다. 전체 방(房) 수만도 약 1,400개나 되는 대규모의 건축물일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대부분 바티칸 미술관과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교황 심마쿠스(재위 498-514년)때 옛 베드로성당의 곁에 교황의 거주관으로 건립된 것이 시초이다.
교황 거주궁은 1307년까지 라테란 궁이었으나 그레고리우스2세가 바티칸 건물을 교황궁으로 정했다. 15세기 니콜라우스 5세이후 수세기에 걸쳐 증,개축하였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 등이 궁전 전체를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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