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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어키 서쪽의 스카만드로스 강과 시모이스 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한 도시였으나 폐허가 되어 오늘날에는 유적만이 남아 있다. 터어키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 6km 지점,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렸다.
이곳의 이름은 트로이, 트로야, 트로이아 등으로 불려져 왔으며 헬레니즘시대와 로마시대에는 “일리움”으로, 호메로스에서는 “일리오스”라 불려졌고 성경에는 “드로아”로 기록되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러 밤에 환상이 그에게 보이니 마케도니아 사람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케도니아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드로아에서 떠나 사모드라게(섬)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보리 항구에 도착했다.(행 16:9-11)
바울의 2차 전도여행시 처음으로 유럽에 건너가는 소아시아지역의 출발지였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에도 에베소에서 드로아를 경유하여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전도활동을 마치고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는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마케도니아로 다녀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행 20:3-4) 그리하여 빌립보교회에서 닷새만에 다시 드로아에 누가와 함께 도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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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바울이 평소와 다르게 밤늦게까지 강론할 때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루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었다.(행 20:9)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를 다시 살렸는데 옛날에 엘리사가 능력을 행한 것과 유사했다.(왕하 4:32-37) 사도바울이 강론했다고 전해지는 현장에 세워진 야외 원형극장은 유적으로 남아 있다. 또한 주변에는 많은 유적들이 있어 관심있게 돌아볼 수 있다.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이 주후 1870년부터 발굴작업을 시작하여 도시의 유적이 밝혀졌다.
드로아의 옛 유적(Tel-Troas)은 지하에 9층으로 이루어졌고 최하층은 주전 4000년대말의 것으로 성벽이 에워 싸있어 그 당시에 성곽도시였음이 확인되었다. 2층에는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과 금은(金銀) 제품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호메로스시대의 도시 유적은 몇 층인가에 대한 고고학자들간에 논란이 거듭되었다. 1930년대에 와서 미국의 고고학자 블레겐이 조직적으로 발굴하여 7층 “A”는 호메로스시대의 도시유적이며 7층 “B”는 철기시대 초기, 8층은 그리스인이 이민한 아르카이크시대, 맨 위층인 9층은 헬레니즘시대와 로마시대 유적으로 밝혀졌다.
이 시대에 알렉산더대왕도 원정도중에 일부러 이곳에 들렸다고 한다.
트로이 전쟁(Troian War)은 그리스의 유명한 작가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영웅서사시에 전해 내려온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의 전쟁이다. 무려 10년간의 장기전에서 최후에 이타케(이오니아의 작은 섬)의 왕자인 지장(智將) 오디세우스(오디세이의 주인공)가 고안한 목마에 병사를 숨기는 계략(트로이 목마)에 의해 무장한 그리스 병사를 숨겨놓은 목마를 트로이 성벽부근에 놓아두어 트로이군이 그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가게 하여 그들이 잠들었을 때 그리스의 병사는 목마에서 나와 성문을 열고 그리스군을 성내로 끌어들여 트로이 성을 점령함으로써 승리하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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