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린도 (Corinth)
고린도 샘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의 칙령에 의해 로마로 부터 추방되어 왔던 아굴라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그와 더불어 천막 제조업에 종사하는 한편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다.(행 18:1-4). 그러나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셨다.(행 18:5-10)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6개월 동안 전도사업을 활발히 전개시키자 유대인들은 그에게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울을 총독의 재판자리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총독 갈리오는 그러한 일에 관여하기를 거절했고 법정에서 물러가게 했다. 갈리오 총독은 로마의 명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네로황제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였다. 그는 동생 갈리오를 평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연 사람들 가운데 그만큼 친절하고 온유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그 형의 호평과 다름없이 갈리오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사악한 행위를 올바로 바라보고 잘 처리하였다. 법정에 있던 유대인들이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달려들어 그를 때렸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부끄러운 패배와 창피를 당한 셈이다.
고린도 운하
이후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한후 겐그레아에서 서원대로 머리를 깎고 아굴라, 브리스길라(브리스가:롬 16:3)와 함께 배를 타고 에베소로 갔다.
고린도교회는 신학적 갈등과 도덕적인 문제로 적지않은 고통이 있었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기초를 세웠다. 또한 주후 52년경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전후서의 편지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어 믿음을 견고케 하였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후에도 고린도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에베소에서 고린도전후서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제3차 전도여행 시에도 들렀다. 그리고 주후 57년경 바울이 이곳에서 로마서를 써서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를 통해 로마에 보내졌다.
고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오늘날에는 고린도 운하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반도가 아닌 펠로폰네소스 섬이 되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이어주는 개미허리 처럼 잘록한 고린도 지협(地峽)이 1893년 운하로 개통되었다.
그리하여 고린도 운하는 현재 동쪽의 에게해와 서쪽의 이오니아 해를 잇는 길이 6.3km, 폭 23m, 높이 86m(최고), 수심 8m의 운하로 해상교통에 절대적인 변화를 갖어와 반도를 한바퀴 돌아야 했던 먼 거리를 약 370km 단축하게 되었다.
고린도의 유적으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끌고 갔던 재판자리인 비마(Bema, 재판석), 회당의 돌기둥, 여러 신전의 돌기둥들, 강당(Stoas), 공중 목욕탕, 샘, 체육관, 야외 원형극장, 아고라, 박물관 등을 돌아볼 수 있다.
펠레폰네소스 섬에는 올림픽이 개최될 때 성화가 채화되는 올림피아(Olympia)가 위치하고 있다. 고린도를 순례하고자 하면 아테네에서 육로로 신고린도까지 약 1시간30분이 소요되며 신고린도에서 택시를 이용하여 구 고린도(5.6km)를 갈 수 있다. 올림피아는 아테네에서 육로로 5시간30분, 기차로 7시간이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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