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데살로니가 (Thessalonica)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
데살로니가는 아테네에서 북쪽 약 530km, 빌립보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km 지점의 데르마익만(Thermaic-灣)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로 지금은 그리스 제2의 도시이며 항구도시이다.
이 도시는 본래 온천 때문에 데르마(Therma, 뜨거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지금은 데살로니키(Thessaloniki)라고 부르고 있다. 성경에는 데살로니가로 기록되어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와 역사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은 20세의 약관에 왕이 되어 가장 젊은 나이로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후 가장 짧은 인생의 삶을 살다가 애석하게도 33세에 요사(夭死)했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자기 이름을 붙인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의 거점으로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여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지역의 나라로 갈라졌다.
알렉산더대왕은 동정(東征)중 마케도니아 본국, 그리스, 트라키아(Thracia)지역의 군사, 정치를 그의 측근인 총독 안티파트로스에게 위임하였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대왕이 갑자기 죽게되자 왕위 계승은 알렉산더 4세(재위 주전 323-310년, 알렉산더대왕 비 록사나소생) 와 아리다오스(알렉산더대왕의 이복동생)로 하여금 공동 통치가 이루어 지도록 하였다.
이때에 총독 안티파트로스는 종전과 같이 섭정을 하는가운데 여러 장군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더(Cdssdnder)장군이 승리하여 알렉산더대왕의 이복누이 동생 데살로니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주전 317년에 카산다는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던 알렉산더대왕의 대비인 올림피아, 왕비인 록사나, 알렉산더 4세, 아리다오스 등을 모두 살해하여 왕통이 단절 되었다.
카산더는 그 수습책의 하나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에게해로 진출하는 가장 큰 항구도시를 건설하여 새 도시 이름을 자기 처의 이름인 데살로니케를 따서 데살로니가라고 부르게 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잔인 무도했지만 데살로니가 항구도시 건설은 역사적으로 빛나는 치적이었다. 로마제국시대에는 마케도니아지역의 정치적 중심의 수도였으며 그후 비잔틴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다음가는 도시로 발전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 올랐을 때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네압볼리항에 상륙후 빌립보에 도착하여 전도활동을 마치고 나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다.(행 17:1-4, 빌 2:22) 그곳 유대인 회당에서 세주간 가까이 복음을 전하게 되자(행 17:3) 불신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폭동을 일으켜 박해하므로 그는 베뢰아로 피하여 거기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다시 베뢰아 까지 따라와서 그를 축출하므로 그는 고린도에 가서 1년반동안 머물게 되었다.(행 18:1-11) 데살로니가 교회 설립의 역사인 바울의 2차, 3차여행은 여러점으로 보아 데살로니가전서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한다. 데살로니가 교회 설립은 수난 중에 전도되었고 환난 중에 실현되었다.
데살로니가에는 비잔틴시대 세워진 20여개의 교회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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