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스라엘의 땅>국방
[8] 국방(Defense forces)
  유대인들은 아랍인들로부터 빈번한 테러와 습격을 당하자 1909년부터 집단농장 안에 하쇼메트(Hashomet, 경비대)라는 자위기구를 조직하게 되었으며 이는 바로 이스라엘군의 태동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달한 1914년 당시 팔레스타인 내에는 43개의 정착민촌의 13,000여 명과 농경 정착민을 포함하여 약 90,000여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1916년 12월 영국의 식민지 확장과 제국주의 발전에 공헌 했던 로이드 죠오지(Loyd George)가 영국 수상이 되고 발포어(Balfour)가 외상이 되었다. 다음해인 1917년 영국정부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을 위한 어떠한 민족적 모국(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이 건설됨을 호의적으로 보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는 발포어선언이 선포되었다.
이 선언이 발표된 지 1개월 후에 영국군의 알렌비(Allenby)장군이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을 기습적으로 점령하게 됨에 따라 오스만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끝이 났다.
유대인들은 발포어선언을 지지 하면서 영국군 작전에 3개 대대가 참전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왔다. 이때에 유대인 부대에는 육군 상등병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 Gurion, 이스라엘 초대수상)이라는 이스라엘 지도자가 함께 들어 왔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의 열을 더해 갔다. 그들이 발포어선언에 바탕을 이룬 것은 당시 세계 각국에 번지고 있던 반 유대주의(Anti Semitism)에 반기를 들면서 시오니즘(Zionism)에 불타는 유대인들이 영국 식민통치의 필요성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1912년에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쌍방 간에 3백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대규모 충돌이 있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각 촌락별로 비밀 지하군사조직체의 방위대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이스라엘군의 명실상부한 모체라 할 수 있는 하가나(Haganah, 자위대)이다.
하가나는 “공격에는 공격으로”라는 원칙을 세워 아랍인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
시오니즘 지도자들의 노력 가운데 하나는 건국을 위한 군사력 확보였다. 영국의 요청에 의한 대독전쟁에 유대인 136,000여명이 지원병으로 등록하였고 그 중에 남녀 27,000여명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영국군으로 참전하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독자적인 유대인 부대가 형성되고 유대인 장교에 의해서 지휘되었다.
1944년에는 그들만의 여단이 편성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될 만큼 규모가 커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팔레스타인 안에서 아랍인들과 싸우기 위해 훈련된 이른바 팔마(Palmah)와 함께 이스라엘 군의 지주가 되었다.
팔마는 그후 전문적인 군인집단으로 독립적인 정예무장 군대의 모체조직으로 형성되었다.
이스라엘의 독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이요 최고의 공로자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게 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유대인에 대한 처참했던 박해와 학살은 조국건설의 열망을 더욱 불태우게 했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선포는 아랍국가들과의 전쟁을 유발했다. 당시 초대 수상과 국방상을 겸한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방위군(IDF, Israel Defense Force)을 창설하여 미비점이 있었지만 51,500여명의 군대를 확보하여 신속하게 아랍국가들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수에즈전쟁에서도 승리했고 6일전쟁과 10월 전쟁에서도 아랍군대를 격파했다.

현재의 정부기구인 국방성 밑에 총참모부의 조직은 ① 지역사령부(남부,중부,북구: 3개 지역) ② 나할사령부(신병훈련소,하사관학교,공수교육대 등), ③ 민방위사령부(H.F.C)로 편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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