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벽의 변천사
  이때에 로마의 행정권에 들어가 유대인들은 탄압을 많이 받았다. AD 66년에 로마에 대항하여 유대인들은 제1차 대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Titus)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파괴됨으로 제2성전시대가 끝났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모두 예루살렘성에서 추방되었다.
[8] 로마(하드리안) 시대
  로마 하드리안 왕조가 예루살렘을 통치할 때 AD 132~135년에 유대인들의 제2차 바르코크바(Bar Kochba)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는 두 번의 반란이 있은 후에 유대인들에게 큰 보복을 가했다. 로마 하드리안(Hadrian) 황제는 당시 유대라는 지명까지도 지도에서 지워버리기를 원하여 "팔레스타인(Palestine)"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것은 이 땅이 유대인들의 땅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적인 블레셋 사람들의 땅이라는 의미로 유대인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예루살렘의 이름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꾸고 예루살렘성에 쥬피터(jupiter) 신전으 건축(AD 135년)하였다.
이때에 예루살렘성의 규모가 축소되고 로마양식에 따라 예루살렘성 내의 건물들이 한 건물처럼 보이도록 하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복도식의 도로가 연결되는 로마식 도시로 변하게 하였다.
[9] 비잔틴(로마기독교) 시대
  로마시대로부터 비잔틴(Byzantine)시대로의 변화는 제국의 수도가 로마로부터 비잔티움으로 옮겨가는데서부터 시작된다.
AD 323년 콘스탄틴 황제(AD 274~337)는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공인하게 됨으로 예루살렘은 종교적, 정치적인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여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된 많은 장소에 기념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즉, 골고다 언덕 위에 예수님 무덤교회(The Church of Holy Sepulcher), 베들레헴에 예수님 탄생교회, 감람산에 예수님 승천교회 등을 건축하였다.
  이 시대의 건축양식의 특색은 교회바닥에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채색한 것이다.
예루살렘성은 에우도니까 황제에 의해 서쪽에 위치한 시온산과 남쪽에 위치한 다윗성터가 다시 성벽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10] 회교아랍 시대
  모하메드(Muhamad, AD 570~632)에 의해 창시된 회교도들은 페리시아와 비잔틴제국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주후 638년에 예루살렘성은 회교아랍국의 오마르왕(Omar)에 의해 점령된 후 약 450년간 회교의 영향을 받았다.
예루살렘성 내에는 모리아산에 바위사원(Dome of The Rock, AD 691), 엘악사사원(El Aqsa Mosque, AD 715)이 건축되어 메카(Mecca)와 더불어 회교도들의 3대 성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비잔틴시대에 세워진 많은 기독교의 교회가 대부분 이 시대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자극되어 성지탈환을 목표로 한 십자군 형성의 동기가 되었다.
[11] 십자군(기독교) 시대
  1095년 교황 우르반2세(Pope Urban II)의 의해 소집된 십자군은 여러차례의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1099년 6월 15일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첫번째 왕위에 오른 볼드윈1세(Baldwin I, AD 1100~1118)는 많은 회교도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사원을 파괴했으며 곳곳에 튼튼한 요새를 건설하였다. 또한 비잔틴시대에 세워졌던 교회가 파괴되었으므로 그 터 위에 다시금 웅장한 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건물의 특징은 규모가 크고 높은 편이나 사용한 돌은 섬세하지 못하였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스테반문 안에 있는 성 안네교회이다. 이때부터 유럽으로부터 많은 성지순례자들이 성지를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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