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벽의 변천사
  그러나 1187년 회교국의 살라딘(Saladin)장군에게 패배하게 되어 1291년 십자군의 최후의 보루였던 악고(Acco)가 무너짐으로써 십자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박해를 당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도시의 규모가 작아졌고 성벽 안에 위치한 시온산과 다윗 성터가 다시금 성벽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12] 오스만 터키 시대
  터키의 오스만(Ottoman)제국의 살림왕에 의해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된 후 1516년 이스라엘에 이어서, 1517년에 애굽이 정복되었다.
슐레이만대제(Suleiman, 1520~1566년)가 1537년에서 1542년 사이에 현재의 예루살렘성을 수축하여 그 당시의 성벽과 성문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유럽과 러시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헤르츨(Teodor Herzl)을 중심으로 시온주의(Zionism)운동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이스라엘 건설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13] 현대 이스라엘시대
  1917년 영국군 총사령관 알렌비(Allenby)장군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알렌비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1개월 전 영국의 외무상 발포어(Balfour)는 1917년 11월 '발포어'선언을 발표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지역을 분리시켜 유대인 민족국가 건설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2년 전인 1915년 10월 29일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팔레스타인들에게도 독립시켜 줄 것을 '맥 마흔 선언'으로 약속하였다.
이 두 선언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오늘날까지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터키가 패배하자 1920년 UN에서 영국이 이스라엘을 위임통치하도록 결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1947년 UN에서 팔레스타인 땅 안에 유대인 국가(Jewish state)와 아랍국가(Arab state)를 양분하여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으나 아랍은 이 결정을 무효로 주장하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받아들임으로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자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아랍국가들과 마찰이 계속되었으며 중동의 4차에 걸친 전쟁을 유발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할 당시 예루살렘성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성벽 밖의 서쪽지역의 예루살렘만을 차지했고, 요르단은 구시가지 전역과 신시가지의 북쪽,남쪽, 동쪽지역을 차지했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에 갈등이 심화되어 중동전쟁에 휘마렸고 소위 3차 중동전쟁으로 불리우는 6일전쟁을 통하여 오늘날 예루살렘성은 이스라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4년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결성되고 1969년에 야세르 아라파트(Yaser Arafat)가 의장으로 취임하여 이스라엘과의 대결이 본격화되면서 빼앗긴 예루살렘성과 기타 자치지역 회복을 위한 갈등이 계속되었다.
그 후 평화정착을 위한 캠프데이비드 협정(1973.3.26)에 이어 마드리드 평화회담(1991.10.31~11.1) 등 여러 차례 협상이 있었고 1998년 10월 와이리버 평화협정이 타결된 후 팔레스타인은 1999년 5월과 2000년 9월에 자치지역에서 독립을 선포한다는 입장이 강경했으나 이스라엘은 결코 독립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계속 대결국면에 있었다.
현 예루살렘성은 오스만 터키시대에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 1537년에서 1542년 사이에 성벽과 성문을 수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17m이며 총연장 길이는 약 4km로써 성벽 상부에 34개의 망대탑과 곳곳에는 현대전에 필요한 총안구와 같은 형태로 방어에 유리하도록 축성되어 있다.
뒤로
다음페이지로
페이지 인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