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해안평야지역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다른 항구들과 달리 항구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추지 못한 곳이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Caesar 주전 27-주후 14년)는 헤롯왕에게 가이사랴 지역을 하사했다. 헤롯왕은 건축광인으로, 로마 황제 가이사에 대한 감사 표시로 항구와 도시를 건설한 후 이 항구도시 이름을 가이사랴(Caesarea)라고 불렀다.
가이사랴는 시장터 아고라(Agora)와 경기장, 야외원형극장, 로마식 공중목욕탕 등을 건축하여 당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대도시로 만들었다. 로마제국은 가이사랴를 유대지방의 행정수도로 하여 정치중심지로 삼았다.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의 관저와 행정본부가 이 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이사랴는 로마시대와 비잔틴시대에 아주 큰 도시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그 유적을 보아 알수 있고 비잔틴시대에 10만명이 거주했었다. 그후 십자군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십자군시대에 가이사랴에 거대한 요새를 건설했고 그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십자군의 보루였던 가이사랴가 1265년 마믈묵에 의해 점령되면서 완전히 파괴되어 모래속에 매몰되어 버렸다. 그후 600년이 지난후 20세기에 접어들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가이사랴의 성은 십자군시대의 규모가 가장 작았고 희랍시대의 성은 십자군시대의 성보다 3배 컸으며, 헤롯시대의 성은 십자군시대의 성보다 8배나 규모가 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관객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을 수 있는 야외 원형극장이다. 지금도 예술가들의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국제적인 규모의 이스라엘 음악제도 열린다.
가이사랴의 유적 가운데 로마식 수로(水路)는 갈멜산 줄기의 샘에서 물을 끌어 들인 대역사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빌라도 기념비
또한 관심을 끄는 유물로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념돌비이다. 이 돌비는 예수를 재판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가이사랴에 주재했었다는 증거이다. 기념비의 진품은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가이사랴에 있는 기념비는 모조품이다.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욥바의 피장시몬의 집에 머물러 있던 베드로를 모셔오게 하여 고넬료와 같이한 모든 사람은 세례를 받게 되었다(행10장) 베드로가 유대인이 아닌 로마제국 장교 고넬료와 그 친지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서 유대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인종과 국가를 초월하여 범세계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역사적인 일이었다.
가이사랴는 사도 바울이 여러 번 전도여행 중 들렸던 곳이며 일곱집사 중 하나인 빌립의 집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행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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