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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벧스안(수 17:11, 왕상 4:12), 벳산(삼하 21:12)이라고 기록되고 있으나 벧산(삼상 31:10)과 동일한 곳이다.
벧산쪽으로 약 10km 뻗어 있는 길보아산의 북서쪽 산하록의 계곡에서 하롯샘물이 흘러나와 벧산을 거쳐 요단강으로 흐른다.
벧산에 처음으로 도시가 형성된 것은 주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며 18차례나 도시가 건설되었던 역사적 사실이 주후 1921년부터 발굴작업이 시작된 이래 그 유물에 의해 고증되고 있고 유물들은 예루살렘의 록펠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시에 므낫세에게 분배된 지역이었으나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의 이 도시를 정복하지 못했다.(수 17:11, 삿 1:27) 그후 사울왕의 시체와 세 아들의 시체를 블레셋인들이 벧산 성벽에 못 박았다.(삼상 31:1-13)
솔로몬왕 시대에 이스라엘에 열두 관장을 두어 일년에 한 달의 식물을 예비시키매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가 이 지역 관장으로 있으면서 왕과 왕실을 위하여 일년중 한 달씩 식물을 준비했다.(왕상 4:7-12)
주전 3세기는 희랍 사람들이 정복했으며 그후 애굽의 통치를 직접적으로 받기도 했다.
주전 62년부터는 로마의 폼페이에 의해 데가볼리의 한 도시가 되어 시도폴리스(Scythopolis)라 개칭되기도 했다.
주후 200년경 로마 원형극장이 약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로 “사울왕 거리”에 건축되었다. 이 원형극장에서 건너다 보이는 언덕지대가 텔 벧산이며 그 밑으로 하롯시내가 지나간다. 벧산은 비잔틴시대에 대규모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현재 진행중인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대규모의 로마-비잔틴시대의 도시를 확인해 주고 있다. 극장과 목욕탕, 거리와 화려한 모자이크를 비롯해 발굴된 유물들은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