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갈릴리 주변지역
 
므깃도 유적 전경
애굽의 바로 투트모세 3세는 므깃도를 점령하는 것이 1,000개 성읍을 점령하는 것 못지 않다는 높은 비중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했다.
역사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주전 3500년전 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역사적으로는 주전 1468년경 애굽의 투트모세3세에 의해 므깃도를 점령하여 힉소스족의 세력을 꺽기 이전에는 반애굽 저항세력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이곳을 점령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수 12:21) 그후의 기록에는 므낫세에 분배되었으나 점령하지 못한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수 17:11-13, 삿 1:27)
므깃도는 다윗왕에 의해 점령되었고 솔로몬왕이 병거성을 건축했다.(왕상 10:26-29) 또한 므깃도를 비롯해서 하솔과 게셀을 견고한 요새로 구축했다.(왕상 9:15) 므깃도성은 솔론왕때에 번창기의 절정을 이루었다.
유다왕 아하시야(주전 842-841년)가 예후에게 공격을 받고 구르 빗탈길에서 쫓겨 도망하다가 므깃도에서 죽었다.(왕하 9:27) 애굽왕 바르느고는 앗수르 왕을 치고자 북진하다가 므깃도에서 유다왕 요시아(주전 640-609년)를 만나본후 죽였다.(왕하 23:29)
므깃도의 솔로몬의 병거성은 애굽의 바로 시삭에 의해 주전 923년경에 파괴되었고 그후 북왕국의 오므리왕(주저 885-853년)과 아합왕(주전 874-853년)이 다시 재건한 성이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주전 322년 알렉산더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에 파괴되어 성으로서의 생명이 끝이났고 더 이상 사람들이 정착한 기록은 없다.
주후 1798년에 나폴레옹군이 주둔했었고, 1917년 영국의 알렌비 장군이 오스만 터어키를 몰아내는 군사 기지로 사용했으며,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아랍동맹군을 맞아 싸운 곳이다.
주전 3000년경부터 므깃도는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왔었다. 주전 4세기까지 무려 24번이나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래서 므깃도는 고대로부터 “전쟁터의 상징”처럼 여겨왔다.
따라서 성경에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으로 종말에 있을 마지막 날의 전쟁터로 계시되었다.(계 16:16) 므깃도 언덕을 히브리어로 할 므깃도(Har Meggido)라고 하며 히랍인들은 이를 “아마겟돈”라 불렀다.
므깃도 언덕에 도착하면 먼저 박물관에 들어가게 된다. 박물관 안에는 솔로몬왕 시대에서 아합왕 시대까지의 므깃도 모형을 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옛 므깃도에 오르면 처음 솔로몬왕 때의 성문의 유적이 있다. 성안의 동쪽 끝 지역에 주전 2500년경 가나안 인들이 자기들의 신을 섬긴 제단이 있다.(출 20:25)

므깃도의 지하수로
성안의 남쪽지역에는 솔로몬시대의 궁전 터가 있고 궁전 터의 북쪽 앞에 주전 8-7세기에 만들어진 우물 같이 굴착된 지하 깊이 7m, 반경 11m의 곡물저장소가 있다. 곡물저장소의 내벽에는 나선형으로 파져 있어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다.
성안의 남서지역에 솔로몬의 마굿간의 유적이 있다. 이 마굿간은 약 450마리를 먹일 수 있는 큰 규모였다. 고고학자들은 이 마굿간을 솔로몬 왕때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했으나 계속 연구한 결과 약 100년뒤인 아합왕때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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