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티칸 시국
 
그러나 게르만의 침입 후 지하매장을 하지 않게 되어 카타콤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주후 2세기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지하 30m에 3층의 카타콤이 발견되었다. 로마 주변에서는 45개소 이상의 카타콤이 발견되었다. 구조는 지하 10-15m 깊이의 동굴에 대체로 폭 1m 미만, 길이 2m 정도의 규격으로 벽면에 시체를 두는 벽감(壁龕, Niches)을 일정한 범위에 종횡으로 설치하여 놓았다. 여기에 남겨진 벽면의 성화, 세워진 비명, 기독교 상징의 물고기 등이 남아 있다.
성 카리스토 카타콤은 4층 구조로 되어 통로가 약 20km나 된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카타콤의 묘소를 사용했다. 이곳에는 10명의 교황이 안치되어 있는 “교황의 묘실”이 있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카타콤은 많은 변화를 가져와서 공식적인 예배장소를 허락하여 카타콤의 지하 교회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지하교회 제단
2. 성 바울 순교 기념교회
(Tre Fontana church of st, paul)
성 바울 순교 기념교회
성 바울 순교기념교회는 트레폰타나교회(성당)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이 세 번에 걸친 장기 전도여행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송사하여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핍박을 했다. 바울은 재판도 받지 않고 가이사랴에 보내져 감옥에서 2년간을 지내야 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시민으로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주장하자 로마로 호송되었다.
바울은 로마에 전도여행을 가고자 로마 교인들에게 로마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전도여행이 아닌 죄인으로 호송되었다
바울은 고통을 억제치 못하며 “가이사랴”를 떠나 시돈을 경유하여 구부로섬을 빗겨서 터어키의 “무라”항에서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타고 항해했다. 그러나 풍랑이 심하여 여러 날이 걸려 그레데의 “미항”에 들렸다가 다시 항해를 계속했다. 그러나 광풍이 대작하여 해상에서 2주 동안 표류하다시피 하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외쳤다.(행 27:23-25) 이어서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이 음식도 먹기 시작했고 안심하게 되었다. 시실리섬에서 남쪽 95km 지점, “메리데항”에 들어가다가 배가 파선하게 되자 군사들이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갈까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고 모든 죄수들도 널빤지로 상륙시켰다.(행 27: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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