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에베소
셀수스 도서관(두란노서원)
옛 에베소 유적은 주전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중 한 사람인 리시마쿠스에 의해 건설되었고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인구가 20만을 넘었으며 오늘날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졌다. 옛 에베소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야외 원형극장은 25,000명의 관객이 수용되는 거대한 규모이다. 이 원형극장 앞에서 일직선으로 폭이 21m, 길이 550m의 대리석 포장길에는 양편으로 돌기둥이 줄 서 있다. 이 길은 에베소 항으로 연결되었다. 원형극장 오른편에는 상업 및 무역도시의 현장인 100m 정방형 크기의 아고라가 있었다. 아고라의 동북편에는 두란노 서원으로 불리어진 유명한 에베소 도서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적을 볼 수 있다. 비잔틴시대에 와서는 에베소 항구가 퇴적작용에 의해 흙으로 채워지고 도시에 말라리아 전염병이 퍼지게 되어 도시가 몰락하게 되자 아야술룩 언덕의 신 에베소 지역으로 옮겨졌다.
주후 50년대에 사도 바울은 두 번에 걸쳐 아르테미스 여신의 도시 에베소에 찾아와 복음을 전파했다. 성경에 에베소에서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우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행 19:8-10)
바울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이용하여 큰돈을 버는 데메드리오의 소동으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신앙의 부부동역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헌신적 협력, 영적 아들인 사랑의 디모데의 힘이 결집되어 복음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 에베소에서 근 3년 동안에 복음이 아시아에 두루 확산되어 골로새, 히에라 폴리,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교회가 세워지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 사도 요한 교회
 
사도요한 교회 유적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기 직전에 에베소로 옮겨와서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그 지방의 다른 교회에 대한 관할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미시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시대에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 나왔다 그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을 뻔한 위험을 수없이 겪었지만 주후 100년경에 에베소에서 평안히 죽었다.
요한의 무덤은 아야술룩 언덕의 중앙 기슭에 있다. 이 무덤 위에 최초 조그마한 교회가 세워졌으나 주후 6세기에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해 그곳에 웅장한 교회를 세웠다. 교회당은 길이가 130m, 폭이 40m의 크기의 십자가 형태로 지어졌다.
교회는 세 개의 회중석이 있어 중앙 회중석은 여러 개의 반구형 지붕으로, 다른 두 개의 회중석은 다섯 개의 반구형 지붕으로 덮었다. 중앙의 지붕과 교회당의 중심부분은 네 개의 사각기둥이 떠받들고 있다.

사도 요한의 무덤은 교회의 중앙에 위치한 마루의 바로 밑에 있는 방에 안치되었다. 요한의 무덤 근처에 있던 샘물과 무덤에서 나오는 재 같은 먼지가 치유의 능력이 있어 병자들이 많이 모여들고 기독교인들에게 순례지의 중심이 되었다.
셀죽크 성채는 요한교회의 북쪽에 인접한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성채에는 열 다섯 개의 탑이 있고 그 안에는 교회당과 회교사원이 각각 하나씩 있으며 물탱크가 여러 개 있다. 전승에 의하면 세상이 잘 내려다보이는 이 성채에서 요한복음을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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