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놀라운 발견은 순금을 제련하던 도가니를 무려 300개 이상이나 발굴해 냈고,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데로 남아있어 크로이수스왕의 전설적인 부가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하게 밝혀 졌다 .
아르테미스 신전은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대왕의 명령으로 건축되어 임신, 출산 다산 및 풍요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이 신전은 길이 100m, 폭 50m로 큰 규모의 신전이었다. 그곳에 78개의 석주와 18m 높이의 이오니아식 석주 두 개가 서 있어 웅장했던 신전이었음을 말없이 입증해 주고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 남쪽 강단 밖에 붉은 벽돌의 작은 터전의 유적은 비잔틴시대의 교회가 세워졌던 곳이다. 최초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교회로 사용하다가 강단 밖에 작은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다. 주후 3세기에 대리석으로 건축된 김나지움(Gymnasium, 체육관)의 유적이 있다. 로마시대에 건축된 체육관으로 전면부분은 복원되어 있다. 김나지움의 옆에는 1,000명 이상 들어갈 수 있는 시나고그(Synagogue)가 발굴되어 지금까지 알려진 회당 가운데 최대 규모이다. 이밖에 유적에서 페르시아시대의 토기조각, 크로이수스왕의 각인이 있는 금화(金貨) 그리고 로마시대의 목욕장, 스타디움(Stadium) 등 비잔틴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되였다.
그 결과 리디아시대뿐 아니라 주전 7-6세기에 걸친 오랫동안에 동서 교통의 요충지로 번영하였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이곳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되었다. 요한계시록에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경고를 받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부도덕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계 3:1) 사데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와 더불어 일곱교회 가운데 칭찬이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였다. 사데는 상공업도시로 번영했으며 직물과 귀금속 생산지로 이름이 났었다. 풍요 속에 사치와 음탕에 빠졌고, 교회는 신앙의 이름과 형식은 있었으나 생명력이 없었다. 그래서 회개를 촉구했고 회개치 않으면 주님이 도적같이 오실 때 알지 못한다고 했다(계 3:3).
|